Strange Neighbor
w. 마늘
warning 가스라이팅, 폭력, 동의없는 성행위
추수감사절과 할로윈을 앞둔 어느 가을. 비가 추적이며 내릴 것만 같은 하늘이었지만, 흐린 날씨는 구름과 축축한 공기만 흩뿌려놓기 일쑤였다. 로키는 욕설을 내뱉으며 구겨버린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집어던졌다. 빌어먹을! 나직하게 낮은 목소리는 섹시한 속삭임처럼 울렸지만, 혀끝에서 만들어진 단어는 그리 고상하지 못했다. 히스테릭하게 던진 종이공은 커피 방울을 튀기며 벽에 부딪혔다. 씩씩대는 숨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로키는 노트북을 신경질적으로 닫아버리고 침대에 뛰어들었다. 창밖은 저녁이 된 것처럼 어둑어둑했다. 이런 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짜증이 나기 마련이다. 차라리 폭풍이 왔으면 좋겠어. 의미없이 중얼거린 문장은 쉽게 사라진다. 물론 폭풍이 온다면 그는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않을 것이다. 작가 로키 라우페이슨의 일상은 지독하리만큼 단순했다. 미팅을 하거나 단골 디저트 샵을 가는 일이 아니면 그가 집 밖으로 나오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가 사는 주택가에서 이웃이 누구든 간에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쓰레기통에서 쓰레기가 넘치지만 않게 해 달라고 빌 뿐. 심지어 왼쪽 이웃은 일주일 전에 이사를 갔고, 오른쪽 이웃은 3일 전부터 여행을 떠난 건지 창문에 불이 켜진 꼴을 보지 못했다. 앞집은 4인 가족이 살고 있지만 그렇게 소란스런 편은 아니었고, 그 가족의 두 아이 역시 얌전하게 지내는 탓에 굳이 불쾌하게 초인종을 누를 필요는 없었다. 로키는 물에 빠진 것처럼 웅웅대는 이명이 들리는 듯 해 귀를 손으로 막았다. 이틀 밤을 꼬박 새었던가. 그는 자신이 언제 눈을 붙였는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는 점을 알아차린다. 조명이 없어도 그리 밝지 않은 아침이다. 잠을 자기에는 조금 웃기고 이른 시간이었지만, 먹먹하고 칙칙한 회색 속에서 그에게 필요한 건 잠이었다. 아주 깊고 깊은 잠.
시간이 꽤 흐른 후, 그가 잠에서 깨어난 건 눈을 찌르는 햇빛 때문이었다. 커튼을 치고 잠들지 않았었던 모양이다. 로키는 삐딱하게 잠들었던 뻐근한 몸을 바로 하며 눈을 끔벅였다. 시계는 7시 14분에서 1시 30분으로 옮겨져 있었다. 분명 회색빛이었는데.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화창하게 개어 있었다. 게다가 창 밖에서는 요란스런 소리마저 나고 있었다. 자동차의 엔진음이 귀에 거슬렸다. 목을 빼어 바깥을 살핀 그는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이사를 갔던 집에 누군가 들어오려는지, 커다란 이삿짐 트럭이 두세 명의 일꾼과 함께 짐을 내리고 있었다. 로키는 2층 창문에 턱을 괴고 그 행동들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깔끔한 가구와 제법 있어 보이는 피아노가 들어온다. 로키는 그가 매일 닦고 손질하는 바이올린을 떠올린다. 음악을 할 줄 아는 사람인가? 그는 약간의 기대감이 생기는 것을 느꼈지만, 금세 고개를 털어 떨쳐내었다. 허세로 가득한 사내일지 모른다. 혹은 여인이거나. 허세를 둘둘 두른 것들은 오히려 그에게 반감을 살 뿐이었다. 로키는 한참동안 옆집 잔디밭에 정리된 채 놓인 색색깔의 화분들을 바라보다가 의문이 들었다. 집주인은 어디 있을까. 깡마르고 깐깐한 원예가일까? 아니면 예술을 하는 사람일까? 그는 속으로 여러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보았다. 피아니스트일지도 모른다. 그 피아노는 꽤 있어 보이는 가구 중 하나였으니까. 로키는 그가 음악가였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했다. 베토벤을 잘 치는 이라면 더더욱 좋을 것이다. 그는 흑백의 건반이 얼굴 모를 집주인의 손가락에 의해 눌리는 것을 상상하고 미소지었다. 음악은 그가 편하게 느끼는 몇 안 되는 것들 중 하나였다. 꿈을 꾸게 해 주고, 날카로운 신경을 조금 누그러뜨릴 수 있는 수단. 그때, 그는 갈색 이삿짐센터 유니폼 사이에서 푸른색과 하얀색이 섞인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있는 사내를 볼 수 있었다. 깨끗한 금발에, 제법 큰 키와 넓은 어깨를 가진 사내였다. 웃으면서 센터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으로 봐서는 그가 상상했던 것처럼 그렇게 히스테릭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사실 그런 성격은 한 스트리트에 자신 하나만으로 충분하다고 로키는 생각했다.) 로키는 사실, 이웃이 누군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상속의 집주인의 모습과 현실의 모습을 둘 다 투영했을 때, 그는 꽤 만족스러움을 느꼈다. 친절한 얼굴의 이웃은 끈질긴 로키의 시선을 느낀 건지 고개를 들었다. 두 시선이 마주쳤다. 로키는 금세 몸을 뒤로 물렸다. 그가 손을 흔들었는지, 혹은 웃어 주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의 친절해 보이는 이웃이 생각보다 더 사람들에게 잘 다가가는 성격이라는 것이다. 조만간 초인종이 울리겠군. 로키는 그가 자신을 보지 못했기를 빌어보았지만 그것이 곧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기억 속에 연파랑색의 눈동자가 남아 있다는 것을 비추어 보면, 그 눈동자 속에 자신의 모습도 남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여간 운도 없는 날이군. 로키는 한숨을 쉬며 금방 또 지끈거릴 것 같은 머리를 달랬다. 창문을 닫고, 한참동안 관자놀이를 문질러도 조금씩 밀려드는 두통을 막는 것은 무리였다. 스트레스만 받으면 미친 것처럼 구는 이 신경들을 죽기 전에는 고쳐야 할 텐데. 두 번째 한숨을 내쉬며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뜨거운 차라도 마시지 않으면 그 거슬림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그는 1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했지만, 녹색 러그를 깐 검은 계단을 다 내려가기도 전에 초인종이 울렸다.
로키는 웃는 낯으로 문을 열어줄 생각은 죽었다 깨어나도 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더 빨리 찾아오셨군. 적어도 저녁은 되어야 방문할 줄 알았는데. 문고리를 쥐고, 그는 살짝 숨을 들이켰다. 지끈거리던 두통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처음 말을 나누는 사람에게 짜증을 낼 정도는 아니었다. 문이 열리고, 햇빛이 가득 들어온다. 빛을 머금은 금발이 제일 먼저 눈에 띄고, 그 뒤로 하늘과 똑같은 색깔의 눈동자가 들어온다. 음. 생각보다 더 예쁜 색이네. 로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안녕하세요. 옆집에 이사 온 사람입니다.”
“네. 낮부터 고생이 많으시네요.”
로키는 그에게 친히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는 무언가 들고 있는 손 대신 다른 쪽 손을 뻗어 그의 손을 맞잡는다. 로키의 미적지근한 듯 차가운 체온 대신, 한낮의 열기를 담은 듯 뜨거운 체온이 창백한 하얀 피부 위를 덮어 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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