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 MARE NEL DdIPIN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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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키는 붓을 들어 물감을 칠하기 시작했다. 초록. 아니, 파랑. 아니, 노랑. 아니, 빨강. 로키는 붓을 내려두고 그림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의 머리카락 색과 같은 검은색만이 작고 네모난 캔버스 위에 남아있었다. 나는 이상하게도 그 검은 캔버스에서 바다를 보았다. 그리고 깊은 우울을 느낄 수 있었다. 우울은 날카롭고, 무겁게 나를 관통해왔다. 그리고 점점 차올라 날 질식시켰다. 분명 로키 또한 그렇게 느낄 것이다. 생기 없는 그의 눈은 아무것도,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천천히 가라앉으며, 혼자서. 혼자서 죽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실체 없는 고통이 늘 그를 따라다니는 듯 했다.

"나는 그림에 재능이 없나 봐. 아무 생각도 안 나."

로키는 검은 그림을 망친 그림이라 말했다.


이곳에 온 지도 벌써 3개월이 지났다.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하고 다니던 마을에서의 첫날이 생각이 났다. 사람이 좋지만, 사람이 싫어 두 번은 못 할 짓이었다. 어릴 적 잠깐 간 바다가 좋아 바다로 왔다. 우리 집은 가난했고, 대부분의 가난한 집이 그렇듯이 금전 문제로불화가 잦았다. 알코올 중독 아버지는 늘 술에 취해 어머니와 나를 학대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마냥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술에 취하지 않을 땐 한없이 자상한 남편이자 아버지였으므로. 술만 아니었더라면. 하지만 아버지는 지속되는 경제 불황 속에서 술을 끊을 수 없었고 학대는 계속 이어졌다. 어느 날은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여행을 갔다. 브루클린의 낡고 작은 아파트에서 벗어나 처음 본 바다는 정말이지, 환상적이었다. 광활한 하늘과 햇빛에 반짝이던 고운 모래, 저녁이면 노을에 붉게 물들었다 어둠으로 모든 걸 삼켜버리는 바다가 좋았다. 그리고 그것이 나와 어머니와의 마지막 추억이다.

잠깐의 행복이 잊히지 않아 얼마 없는 돈을 털어 바닷가의 작은 집을 샀다. 1층은 작업실을 꾸려 화실로 사용하고 2층은 집으로 사용했다. 그렇게 화실에서 몇몇 마을 사람들에게 그림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작업한 그림은 잊을 만하면 팔렸다. 많은 돈은 아니라도 이곳에서 생활하기엔 적지도, 많지도 않은 그저 그런 수입이었다.


그전에는 군인으로 살았다. 총과 연필, 피와 물감, 죽음과 창작.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미대를 졸업하고 방황하다 군에 입대했다. 두 번의 참전을 마지막으로 폭발물의 잔해가 왼손을 꿰뚫었다. 그 덕에 군복을 벗고 의병제대를 하게 되었다. 그 일만 아니었으면, 아직도 군복을 입고 있었을까? 아니, 사실은 잘 모르겠다. 군인으로서 생활은 잘 맞았으나 그곳에서 내가 늙어가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 덕분엔 적지만 연금도 밀리지 않고 잘 받고 있다. 앞으로 예술로 먹고살 나로선 이것만큼 좋은 이점이 어디 있는가. 폭발물의 큰 파편은 지울 수 없는 흉터와 그날을 잊을 수 없게 손을 심하게 떠는 후유증을 남겼다. 그나마도 왼손인 걸 다행으로 생각했다. 오른손이었으면 그림을 그리지도, 이곳에 올 생각조차도 못했을 거다.


로키는 그림을 배우는 마을 사람 중 한 명이다. 주에 세 번 화실에 들려 그림을 배운다. 그는 특이하게도 바다 사람치고는 검은 옷을 즐겨 입었다. 주변에 널린 게 백사인데 그의 옷에는 모래 한 톨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몸에서, 옷에서 나는 소금기 짙은 은은한 바다 냄새만이 그가 바다에 사는 사람인 걸 알 수 있게 해주었다. 그는 이곳에 오래 산 늙은 어부의 둘째 아들로 사람들 말로는 추운 겨울 바닷가에 버려진 아이를 그 어부가 입양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로키는 바다를 썩 좋아하지 않아 보였다. 본인은 바다를 '싫어하진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로키는 파도 같았다. 늘 불안정하고, 저 먼발치 있다가도 땅에 가까워지면 부서져 사라지는. 나는 가끔 그가 정말로 내 앞에서 부서져 사라질까 봐 겁이 났다.


로키는 그림을 그리다가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연필로, 붓으로 까맣게 덮어버렸다. 처음에는 놀라 몇 번씩 이유를 물어봤지만, 대답은 '마음에 들지 않았어.', '너무 못 그렸어.', '그냥.' 등 비슷한 말만 반복했다. 로키가 그림을 까맣게 덮는 이유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더니 로키는 어둡고 무채색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색을 사용하는 것을 포기한 것이다. 흑색과 백색 이 둘을 제외하곤 다른 색들을 요란스럽게 느껴 했다. 다른 사람에겐 표현의 폭을 넓혀주는 색색의 색들이 로키에겐 오히려 독이 되는 것 같았다. 그를 옥죄여 온다 해야 하나?

로키가 요즘 그리는 그림은 유화를 이용한 두껍고 간결한 터치가 들어간 그림이다. 로키는 그림을 배운지 몇 개월 안 되었지만, 꽤 높은 완성도의 그림을 그렸다. 그 별개로 사람의 눈과 마음을 잡아두는 무언가가 있었다. 힘 있지만 있지만 우아하고, 슬프지만 정적이 있었다. 정작 붓을 든, 그림을 그리는 로키의 눈은 아무 감정도, 생기도 없었다. 의미 없고 무기력한 지친 붓질의 반복이었다. 빛 잃은 녹색 눈은 오히려 모든 걸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로키의 지친 표정 아래 많은 감정, 대부분 괴로움과 슬픔이 느껴졌다. 뭐가 그리도 괴롭고 슬픈 것인지 조금이라도 들어내 내게 말해 준다면 좋을 텐데. 모순적이게도 나는 그의 고통이 좋았다. 내가 그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 수 있을 거 같았다. 주제넘은 생각인 건 당연히 알고 있다. 나조차도 완벽하지 않은데, 손병신이 되어 시골에 온 퇴역군인 주제에. 남들이 보기엔 불쌍하고 실패한 인생이. 하지만 사람이란 게 참 영악하고 이기적인 동물이다. 정상 아닌 사람이 정상인 척 불안정한 사람을 곁에 두고 도움과 친절로 위장해 손안에서 이리저리 굴려 먹을 생각이나 하는 날 보면, 역겹다. 내가 생각해도 나 자신이. 하지만 로키는 나를 역겹게 만들어서라도 얻을 그럴 가치 있는 사람이다. 나는 그것에 만족했다.


로키에게는 애인이 있다. 로키의 애인은 바다와 마을을 한 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 위 호텔의 소유주라 한다. 이름은 다니엘, 나와 같은 타지인이다. 유부남이다. 불륜관계다. 로키와 다니엘의 사이는 꽤 깊어 보였다. 나는 다니엘을 어쩌다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다. 한참 집을 보러 다닐 때 그곳에 머물렀으니. 많은 시골이 그러하듯 본토박이와 외지인은 말은 섞어도 섞일 수 없는 그런 게 있다. 그러다 보니 호텔에서 마주친 그와 잠깐 '외지인끼리' 할 수 있는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은 적이 있다. 그는 물려받은 호텔 사업 때문에 이곳에 장기적으로 머물고 있다고 한다. 훨씬 예전부터 이 마을을 왔다 갔다 하다 눌러살게 되었다고 하는데, 부인은 시골을 싫어해 어쩔 수 없이 주말부부로 지낸다.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남매가 있고, 부인은 지금도 매주 아이들과 함께 다니엘을 보러 온다고 한다. 뒷말만 들으면 매우 단란하고 이상적인 주말부부의 이야기다. 다니엘의 아내는 아직 로키의 존재를 모르나 보다. 그럴 만도 한 게 나도 호텔에서 로키를 마주친 적이 없었다. 생각하면 밖에서도 그와 같이 있는 모습도 볼 수 없었다. 둘의 사이를 알게 된 건 내가 직접 본 것도, 로키의 입에서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입에서다.

좁고 작은 마을일수록 눈과 귀, 입이 몰려있다. 마을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많은 말을 해준다. 집안 이야기, 남의 험담, 마을의 역사, 주요 사건, 새로운 가십거리 등등. 마을에서 로키의 평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물론 그 애인도 마찬가지다. 온갖 추측과 소문, 목격, 진실, 나는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것들을 많이 들었다. 나는 언제부터 둘이 그런 관계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 말에는 진실도 있겠지만 거짓과 폄하가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해 있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앞서 말했듯이 다니엘은 로키의 애인이다. 불륜이다. 애인이란 말답게 둘은 섹스한다. 로키는 애 딸린 유부남과 섹스한다. 그리고 나는 그런 로키를 원하고 있다. 

나는 갑자기 궁금했다. 로키는 섹스할 때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때도 이렇게 빛 잃은 눈일까. 아니면 흥분에 가득 차 눈물을 흘리진 않을까. 좀 더 사랑스러운 표정일까. 너무 오랫동안 그를 보았나 보다. 로키는 무슨 할 말이 있냐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당황해 무슨 말을 할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렇게 나온 말은 지금 생각하면 벽에 머리를 박고 싶을 정도로 헛소리였다. 로키의 비정상적인 관계를 알게 된 후 내 사고도 비정상이 되었나?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그가 날 이렇게 만든 것이다.

화실을 닫고, 해가 질 무렵 로키와 근처 바다를 같이 걷기로 했다. 나는 맨발이었고 로키는 검은색 구두를 신고 있었다. 어떻게 포슬포슬한 백사장을 구두를 신고 걷지? 바닷사람은 뭔가 다른가 보다. 나였으면 이미 신발에 모래가 가득 차 있을 텐데. 로키는 모래가 들어간 흔적도, 불편한 기색 없이 깔끔했다. 습하고 비릿한 바닷냄새가코끝을 간질였다. 해는 이미 수평선 끝에서 하루의 막을 내리고 있었다. 이제 곧 어둠이 몰려오겠지. 이 모든 게 어둠으로 사라졌으면 좋겠다.

우리는 돌아와 술을 마셨다. 술집이 아닌 집에서. 작업실에 등불을 두어 개 켜 은은한 달빛과 일렁이는 불빛에 의지해 술을 마셨다. 로키는 술에 취해 다니엘의 이야기를 했다. 어차피 마을 사람에게 들어서 다 알고 있지 않냐며 천연스럽게 말했다. 그를 어떻게 만났는지, 그가 좋아하는 음악은 무엇인지, 못 먹는 음식은 무엇인지, 그가 호텔에서 제일 좋아하는 방 호수가 몇 번인지 등 그에 관한 잡다한 말들을 얇은 입술로 조잘조잘 내뱉었다. 그때의 로키의 눈빛은 생기 없는 눈이 아닌 불꽃에 일렁여 노을이 비치는 바다와 같은 눈 이였다. 아름다웠다. 나는 눈가가 붉게 물든 채 헛손질하는 로키의 손에서 술잔을 빼냈다.

"너무 많이 마셨어요."

"아니야. 더 마실 수 있어."

로키는 손을 뻗어 술잔을 다시 가져오려 했다. 나는 술잔을 로키에게서 멀리, 테이블 바깥쪽으로 슬쩍 밀어놓고 그런 로키의 손을 꼭 맞잡아 테이블 중앙에 올려두었다. 로키는 손을 한 번 나를 한 번씩 보더니 내 눈을 보며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다니엘 이야기는 많이 들었으니, 로키, 당신의 이야기가 궁금해요. 저는……."

로키는 이를 내보이며 예쁜 웃음을 터트렸다. 그에게선 자주 볼 수 없는 환한 웃음이었다. 그리곤 슬쩍 손을 빼 자신의 얼굴을 감싸 비비고서 주먹을 말아쥐어 눈가를 지그시 눌렀다. 네 말대로 많이 마신 것 같다며, '대부분은 마을 사람들 입에서 들었을 거로 생각했는데……. 나에 대해 무엇이 그렇게 궁금한가요. 대위님?' 하고 비꼬며 말하는 것 보니 생각보다 많이 취한 것 같진 않았나 보다. 로키는 야살스럽게 한 잔만 더 마시게 해주면 다른 사람들에게선 듣지 못했을 이야기를 해주겠다며 말했다. 꽤 달콤한 제안이었다. 한참을 그의 눈을 바라보다 나는 옆으로 뺀 술잔 끝을 잡고 로키 앞으로 밀어주었다. 로키는 만족스러운 듯 술을 입에 대었고, 술을 한 모금 머금어 입안을 헹구듯 마셔 넘겼다. 풀린 눈동자에 노란 불빛과 내 모습이 비쳐 보였다.

Posted by 우훗우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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