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잠(沈潛)

w. 써머










두꺼운 카펫에 바쁜 구둣발 소리가 먹혔다. 상관의 연락을 받고 나선 걸음은 언제나처럼 조급했다. 복도 끝에서 걸어 나오는 자신의 상관과 마주친 스티브 로저스는 걸음을 멈추고 절도 있는 동작으로 경례했다.


“오늘도 잘 부탁하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말을 건넨 그는, 제 하관의 어깨를 두드리며 지나갔다. 하지만 그의 하관은 엘리베이터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부동자세를 풀었다. 장군의 언사(言辭)는 장난스러웠지만, 그의 시선은 정확하게 저의 속을 꿰뚫고 있었다. 그는 수십의 전쟁을 거치고, 그보다 더 잔악한 권력다툼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남자였다. 긴장이 쉬이 풀리지 않았다. 


 문 앞에 다다른 스티브는 숨을 한번 내 쉬고 문고리를 돌렸다. 현관과 이어진 통로를 지나고, 그의 눈앞에 도시의 화려한 야경이 가득 찼다. 붉은 벽으로 둘러진 넓은 방은 밝게 부서지는 크리스털 조명과 금빛의 화려한 가구들로 채워져 있었다. 모든 것이 규칙적으로 정렬된 곳에서 혼자만 흐트러진 넓은 침대가 눈에 띄었다. 적포도주 색의 벨벳 쿠션은 침대 위아래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고, 주름 하나 없이 세팅되었을 하얀색의 시트는 이리저리 구겨져 있었다. 그리고,


“안녕, 캡틴.”


 나른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손만 가볍게 살랑였다. 

 상관이 부탁하고 간 그의 젊은 정부(情婦)는 창을 향해 모로 누워 있었다. 길게 몸을 누인 그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지만, 이불은 그의 발치에 뭉쳐 있을 뿐 몸을 가릴 생각은 전혀 없어보였다. 


 스티브는 그의 인사에 대꾸 없이 재킷을 벗었다. 그는 재킷을 가지런히 의자에 걸쳐 놓고, 소매를 팔꿈치까지 접어 올렸다. 


“너무 뜨겁지 않게.”


 욕실로 향하는 스티브의 뒤로 그의 목소리가 조그맣게 울렸다. 그가 매번 주문하는 -너무 뜨겁지 않게-의 온도는 익숙한 것이라, 스티브는 손으로 물의 온도를 몇 번 확인하고는 수건을 적셔 물기를 짜냈다. 


 적신 수건을 두어 개 더 챙겨 욕실에서 나왔다. 여전히 자신에게 등을 지고 누워있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스티브는 조심스럽게 침대에 올라갔다. 아직 더운 김이 나는 수건을 그의 등에 천천히 얹었다. 등에 닿아오는 온기가 마음에 드는지, 그는 고양이마냥 갸르릉- 소리를 냈다. 



<중략>



스티브의 행동이 일순간 멈췄다. 그리고는 곧장 그의 손목을 가볍게 그러쥐고 떼어냈다. 


“장난이 지나칩니다.”


  푸흐흐- 웃음이 가볍게 흩어졌다. 그는 두 팔로 얼굴을 가린 채 한참을 키득댔다.


 상관의 고양이는 무척이나 변덕스러웠다. 이렇게 장난을 치며 웃다가도,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갑자기 꼬리털을 바짝 세우고 이를 드러냈다. 또 어느 때에는 뾰족한 눈으로 날선 말을 잔뜩 하다가도, 눈을 굴리며 저의 눈치를 보았다. 스티브는 그때의 그 초록색 눈동자를 기억에서 더듬으며, 가슴과 배, 그리고 이어진 아래까지 닦는 손을 느리게 움직였다.  


  스티브는 다시 수건을 적셔왔다. 그는 그 사이 잠들었는지 고른 숨소리가 났다. 가까이 다가간 그는 허리를 숙였다. 얼굴에 어지럽게 늘어진 까만 머리칼을 손으로 빗어 넘기자, 눈을 감은 말간 얼굴이 드러났다. 여운으로 아직 발그레한 낯이다.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스티브는, 땀에 젖어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마저 정리했다. 깨끗하게 드러난 얼굴에 반듯하게 접은 수건을 이마부터 살며시 눌렀다.


 캐비닛에서 정갈하게 개켜있는 가운을 가져왔다. 오는 걸음에 침대 아래 떨어져 있던 흰 가운이 까만 구두에 채였다. 가져온 가운으로 그의 몸을 감싸고, 자신의 재킷을 그 위에 둘렀다. 스티브는 두 팔을 그의 몸 아래 밀어 넣고 천천히 들어 올렸다. 품에 안긴 그는 여전히 잠에서 깨지 않았다. 그의 머리를 제 가슴께에 기대게 하고, 두른 손으로는 빛을 가렸다. 방을 나서는 걸음이 조심스러웠다.


Posted by 우훗우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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