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do quia absurdum

w. 레비











Credo quia absurdum,

I believe because it is absurd.

 



스티브 로저스가 하루를 보내기 위해 들르는 곳은 그의 아파트와 체육관 그리고 체육관 근처에 있는 카페테리아와 인근의 식당이 고작이었다. 정해진 곳에서 훈련을 받고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하는 군인으로서의 일상이 몸에 배어있던 터라 21세기에 깨어나서도 여전히 그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체육관으로 향하고, 오전의 운동을 마치고 체육관 근처의 카페테리아에 들러 점심을 먹고, 다시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다가 근처 적당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다시 아파트로 향한다. 평일 뿐 아니라 주말에도 스케줄에 변화가 없었고 심지어 매일매일 이동하는 시간도 거의 일정할 만큼 같은 하루를 반복했다. 지루하리만치 단조로운 일상, 일견으로는 그가 이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하루하루를 불만 없이 이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오늘도 어김없이 같은 시간 같은 자리로 찾아든 스티브를 보고 점원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주방에 오더를 넣고 그가 앉은 자리로 다가왔다. 점원이 메뉴판을 스티브의 앞에 내밀었다. 변하는 것 없는데도 스티브는 펼친 메뉴판을 앞장에서부터 꼼꼼히 살핀다. 늘 같은 메뉴를 시키는 걸 아는데 왜 고민하는 척 시간을 끄느냐는 듯 점원은 제 가져온 볼펜으로 똑딱똑딱 소리를 낸다. 점원의 무례한 태도에도 아랑곳 않고 메뉴판을 뒷부분까지 꼼꼼하게 읽어보더니 스티브는 늘 먹던 것을 시켰다. 점원은 메뉴판을 집어 든다고 내려놓았던 볼펜을 잊고 돌아갔다. 점심시간이라 스티브 이후로도 여러 손님이 들어와 점원은 제가 볼펜을 놓고 간 줄도 모르고 가게 안을 바삐 돌아다닌다. 스티브는 점원이 놓고 간 볼펜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제 주인에게 잊혔다 싶은 볼펜을 집어 들어 종이 넵킨에 끄적끄적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딸랑, 문에 달린 벨 소리와 함께 그가 들어온다. 기다리던 발자국 소리라는 걸 단번에 알아차린 스티브가 넵킨 안을 가득 채우던 손놀림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가게로 들어선 이는 스티브로부터 따라붙는 시선 따윈 의식하지 않고 늘 앉던 자리에 앉았다. 그 역시 거의 늘 같은 자리에 앉는다. 창가 인근 햇빛이 잘 들어오는 자리로. 간혹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자리가 없으면 미간에 잔뜩 인상을 쓰다가 도로 나가버리곤 했다. 스티브는 그의 태도가 선뜻 이해되지는 않았다. 이곳이 마음에 들어서 찾아온 것일 텐데 예약도 하지 않고 무작정 왔다가 자리가 없다고 인상을 쓰며 가버리다니. 

그렇다고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일찍 오느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는 스티브와 달리 가게로 오는 시간이 일정치 않았다. 스티브보다 일찍 오기도 하고 어느 날은 보이지 않기도 했으며, 또 나가는 길에 마주쳐 어깨가 부딪히기도 했다. 어깨가 부딪히고서 그는 신경질적으로 보일만큼 날카롭게 스티브를 흘겼다. 어깨가 따갑다 느껴질 정도로. 사소한 부딪힘에도 예민하고, 타인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는다. 이런 행동양식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상당히 거만하고 자신에 대한 프라이드가 높은 사람이라 짐작됐다.

다가온 점원에게 주문하고서 그는 시선을 휘 돌려 창가 너머 파란 하늘로 던진다. 가을을 맞아 청명한 뉴욕의 하늘은 완벽하게 푸르렀다. 시야를 가리는 구름 한 점 없이 깊고 푸른 바다처럼 새파랗게 빛난다. 그는 마치 떠나온 고향을 그리는 듯한 얼굴을 하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렇게 그가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야말로 스티브의 시선이 가장 진득하게 붙는 때였다. 밀랍인형처럼 하얀 얼굴, 뚜렷한 이목구비와 각진 턱 선을 가진 강한 이미지임에도 어딘지 모르게 풍기는 여린 인상은 묘하게 눈길을 훔쳐간다. 흔하게 보기 힘든 까만 흑발은 선명하게 빛을 내어 그의 안색이 더 파리해보이게 만들며 이질적인 느낌마저 주었고 키는 비죽하니 크고 거의 근육도 없이 바싹 마른 몸매는 남성보다는 여성에 더 가까워 보이기도 했다. 

하염없이 바라보던 중 하필 고개 돌리던 그와 눈이 맞았다. 그런데 스티브와 시선을 부딪친 그가 예전처럼 미간을 좁히거나 얼굴을 찡그리는 게 아니라 도리어 입가를 슬쩍 끌어올리는 게 아닌가. 몰래 훔쳐보다가 시선을 들켰다면 제 도둑 시선을 부끄러워하면서 거둬야 하건만, 오늘 스티브는 그러지 않았다. 그의 미소를 보는 순간 기묘하게도 용기가 솟아올라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동석해도 되겠습니까.”



Posted by 우훗우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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